뭐라고 나불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실존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특시 토스토예프스키와 알베르 카뮈, 프란츠 카프카,
장 폴 샤르트르의 작품들에 실존주의 철학의 주요테마가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실존주의는 연극 장르에서 부조리극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사무엘 바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대표적이다.
극중에 실존주의가 등장인물이 지닌 삶을 향한 태도나
가치관으로 종종 표현된다.
이를테면 등장인물은 삶을 파라독스로 바라보며 인간관계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 유독 모호하고
부조리한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삶은 무척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하며,
따라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단정지을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있을 수 없다.
logos(말)가 나와 내 세계를 규정하고 일반화하고 체계화시켜
억압한다면 본능적으로 거부할 것이다.
대신에 난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본성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고, 도덕률과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내 개성을 최우선으로 두기로 했다. 나는 한번 진실을 선택했다면
끝까지 그것을 따르고, 어떤 다른 길이 나오더라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져야한다고 믿는다.
설사 그 길이 Non-Being이라는 위협에 노출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오직 자신의 믿음만이 실존을 정의한다.(faith defines
your existence) 는 점이 분명해진다. 만약 내가 초월을 목표로
망각의 깊은 속으로 뛰어든다면, 죽음은 내 삶의 가장 진실되고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내 신념으로 증폭된 개인적 잠재력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죽음을 삶으로 끌어들여서 철저히 인정하고 직시한다면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삶의 자질구레한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 때에서야 진짜 내가 될 수 있다.
결국 초월을 이루느냐 마느냐가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 그 자체이다.
'존재의 없음'이 주는 공포를 맞닥드릴 수 있는 용기,
삶의 비극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흘린 피와 눈물과 땀, 그리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
잡초같은 희망.
그런 정신이 한 존재를 '인간'으로 정의한다.
까뮈의 '이방인'이나 보부아르의 '초대받지 않은 여인' 같은
소설에서 주제로 다루어지는 것은 '소외'이다.
적어도 자신이 속한 사회를 비어있고 무의미한 것으로 느끼는 사람,
종교, 군대, 국가 등의 권위가 만든 사회적 제도나 규정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데서 오는 '소외'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소외가 사랑하는 사이까지 지배한다는 생각은
동의하기가 좀 꺼림직하다.
영화를 통해 신학과 철학을 사유한 최초의 감독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1957년도 作 '제7의 봉인'(언젠가 EBS에서
방영했던 영화)은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 시사하듯 다분히 신화적이고 설화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다룬다.
황폐한 시대에 의미를 상실해가는 신의 존재와 구원의 가능성을
묻는 이 영화는 비록 십자군 원정이 끝난 중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인간의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를 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우리 시대의 모습 또한 반영한다. 때문에 인간의 대립과 고립,
단절로 인해 고통받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것은 불확실성과 부조리로 가득한 패러독스의 세계이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의 에스트라공 처럼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해하고 부조리하다.
인간은 왜 그가 이 세상에 던져졌는지 결코 파악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목숨을 부지하며 흔히 죽음이라고
일컬어지는 비존재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영화의 주인공인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 역시 첫 장면에서부터 종자인
옌스와 함께 해번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등장하는데,
이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바다는 무의식 또는 망각의 깊이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양수를 상징하므로
블로크와 옌스는 태어나자마자 기암괴석과
황량하고 쓸쓸한 모래벌같은 세상에 내던져진,
이른바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들인 것이다.
기사 블로크는 결코 삶과 죽음,
신과 인간에 관한 의문을 멈추지 않기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세월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일종의 방랑자이다.
그는 고난과 시련, 불안과 연속과도 같은 삶의 비참한 단면을
인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음의 절대성 앞에 나약하고 무력하기만 한 인간 조건에
혐오감을 느낀다.
아무리 고도를 기다려도 오지 않자 블라디미르과 에스트라공은
절망한 나머지 나무에다 목을 매고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죽지 않은 까닭은
여전히 힘껏 껴안아줄 수 있는 '서로'가 있어서이다.
그것이 인간이 놓을 수 없는 마지막 희망이다.
한줄요약
그딴거 업ㅂ다. 닥치고 스크롤 ㄳ
주절 주절 주절 주절 주절 주절 주절 주절
라디오가 쉴 새 없이 떠들어제낀다. 내일은, 날씨가 어떻겠구나,
지금 서울 교통은 어떻구나, 따위의 소식들이 마치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확실히, 누가 그랬더라? 아, 그렇구나,
라디오에서 들었지, 하고 말할법한.
심심하지는 않다. 그야, 그렇게 떠들어대니까, 귀를 기울이고, 배가 아플 정도로 웃다보면, 시간을 흘렀다. 하루가 지났다. 지금 몇시지? 이런, 역시 문명이란 좋은거야. 언젠가는, 오늘이 몇일이지? 하고 무한한 몰입감, 흘러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 뒤늦게 찾아온 허무함 따위가 짭쪼름하게 버무려진 자문 따위를 중얼거리게 되겠지..
딸깍, 하고 라디오를 끈다. 가만 생각해보면 심심하지 않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세, 그게, 그러니까, 확실히, 철없던 시절에는 그랬다. 분명, 심심함과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동의어로
인식되었구나, 싶은,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는 그 시절이라는게 있었다면 분명, 인간 본성이라는 것에 적어도 한발짝 정도는 다가서 있지 않았을까. 지금보다는, 적어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심심하지 않기 위해, 어울렸다. 친구라는 녀석들과..
돌이켜보면, 친구라는게 참 그렇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치사한 자식부터 시작해서, 늘 빈대붙던 자식, 싸가지 없던 자식, 갑자기 혈압이 오르고, 이가 갈리고,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데, 어쨌건 친구라는 것들이 없다면 나 자신에 대해서 혈압이 오르고, 이가 갈리고, 내가 정말 왜 이러고 있나 싶지 않을까 하는, 그렇고 그런 것이다.
심심하지 않기 위해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면, 외롭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애초에 성선설 따위를 믿어서 착하게 살아온 인생은 아니지만, '함께'수업을 제끼고, 체육관 뒤편에 누워 담배 한대를 태우고 있으면,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게 바라보며 구름을 만들어 흘러보내고 있으면, 아, 지구가, 돌고 있긴 하구나- 하고 놀라게 된다.
내가, 이 곳에, 살아있구나, 언제 끌려가서 벌을 받게 될지, 계속 제껴버릴지, 그런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거구나, 삶이란 것은, 그래, 삶이란 그냥 좋은 거야, 나른하다,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거, 좋은 삶이면 비싼 담배 좀 피지, 시끄러워, 하고 나는 눈을 감는다. 웅얼웅얼~
딸깍, 하고 다시 라디오를 켜본다. 대체 뭐가, 심심함과 외로움을 따로 나누어버린 것일까. 에이씨, 어릴 때는 , 안그랬는데, 세상 참, 복잡하네. 감당해야 할 감정이 하나 더 늘어버렸으니, 어쩐지 손해보는 느낌이랄까. 시험봐야 할 과목이 하나 더 늘어난 것도 아닌데 뭘, 하고 고민하던 날 보다못한 친구는, 말했었지.
심심하지 않게 위해, 그건 절박한 이유다. 얼마나, 라고 묻는다면,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인류는 심심했던 나머지, 인쇄술을 발명했고, 자동차를, 라디오를, TV를 발명했다고. 어쩌면,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종교라는 것도 심심하니까 우리 함께 모여서 뭐라도 해보자, 하다가,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요새 항간에 유행하고 있는 음모론적인 말이지만, 예수님이 심심했는지, 부처님이 심심했는지,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구인들끼리만 노는 것조차 몹시 심심했던지, 인간은 우주항공국 따위를 설립하고, 우주로 가는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른다. 심심하지 않기 위해, 이루어낸 인류의 성과들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이것은 아이러니요, 어떤 공교로움이라고 부를법하다.
또르르. 또르르 하고 라디오 휠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낯설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쳐서일까, 분명 이건.. 새로운 느낌.
혀로 입맛을 다시다, 혀 끝이 교정쇠에 닿았을때 느껴질법한 강한 이물감 같은 것이 팽팽하다.
오호라, 그랬군, 문제는 '문명의 이기'였던게로군, 하고 생각하며, 45킬로짜리 중국산 수입콩을 수천박스 운반해서 장만한 라디오를 다시한번 쳐다본다.
야, 짜식들 니네 엠피삼 샀구나? 어, 같이가서. 근데, 둘이 똑같네?
한 녀석은 발끈, 하며 얼굴을 붉힌다. 딸기같다. 아냐 임마, 내껀 1기가 짜리고 얘껀 512짜리라고. 그래, 그렇구나. 그런거로구나. 근데 둘이 똑같네? 울그락붉으락 확실히, 그냥 봐선, 뭐가뭔지..
기분 이상해. 뭐가? 난 분명 돈을 두 배 가까이 냈는데, 똑같잖아.
마치, 4천만원짜리 차를 샀는데, 2천만원 짜리랑 똑같이 생겼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뭐야 그게, 라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보는 내게,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던 그 녀석은,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말한것처럼, 소유의 실질적 가치라는 것에 심하게 집착하는 부류의 종족이었던 것일까? 나에겐 2천만원도, 4천만원도.. 다른세상 이야기만 같은데..
오, 이거 좋다. 근데 용량이 다 차면 어떻게 해?
지워. 지워? 응, 지우고 다른 걸 저장하면 되.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이상하다. 기분이. 그렇게 저장했다, 지웠다, 저장했다, 지웠다 하면 그 음악은 어떻게 되는거지? 흔적도 없이 사라질텐데.. 그렇다면 내가 그 음악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잇을까? 좋아하는 무언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건, 참, 가슴 한켠이 따끔따끔 쓰라린 일이구나.
무슨 소릴 하는거야, 더 큰 용량을 지원하는 최신기종이 얼마나 많은데, 컴퓨터에 저장해도 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음악은, 마음속에 있는거야, 라고 친구는 해맑게 웃었다.
아, 그렇구나, 음악은,
마음속에 있는 거구나..
정말, 그럴까? 수십기가짜리 최신기기에 좋아하는 음악을 한가득 집어넣고, 그 용량의 무게 때문에, 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을 만큼 넘쳐나는 여유공간을 가지고 있다한들, 나는, 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찰에게 쫓기는 도선생마냥, 심각한 표정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저장과 삭제를 무한반복하게 되는건 아닐까?
넘는 공간이기에 채워야만 하고, 다 채우면 공간이 부족하기에, 더 넓은 공간을 찾는 우리들은 확실히, 너무 지쳐있는것은 아닐까?
메모리카드를 1기가 짜리에서 2기가 짜리로 바꿨어. 근데, 허무하다. 왜? 라고 묻는 내게 앞에 적힌 숫자가 1레서 2로 바뀐 것 외엔 아무것도, 라고 중얼거리던 친구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너무나도, 어두웠다. 너무, 너무,,
문득 형이 보고싶었다.
새로 옮긴 형의 자취방은 딱 그정도였다. 넓다고 하기엔 조금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좁다고 하기에도 조금 그런, 딱 그정도.
너무 오래들어, 더는 듣고 싶어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은 오래된 테이프를 태우던 형은, 왔냐, 라는 웃음과 함께, 계속해서, 불에 태웠다. 활활, 뜨겁게. 그곳에서 어떤 숭고함 같은걸 느껴버린 난, 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영화 같은 거 보면, 나오잖아. 뭐가요? 그냥, 사람들이 헤어진 연인 사진같은거 불에 태우면서 질질짜고 그러잖아. 아, 네. 옛날엔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거든? 아, 네, 라고밖에 할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형은.
태워버릴 것이 남아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은거야. 무언가가, 존재하는 거야. 무언가? 그래, 무언가. 그건,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아, 네. 과연, 그도, 그럴법 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암흑의 메커니즘 같은 것에 의해 기계가 제멋대로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 태운다. 땔감을 모으고, 불을 켠다. 형의 의지고, 형의 행동이며, 형이 실존이라고 부를 만한 그 어떤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테이프를 태우고 있으면 말야, 이제껏 내가 듣던 음악들이 차례로 귓가에 들려온다. 정말요? 에이..그걸 농담이라고 하시나. 너, 짜식 이거.. 넌 이런 거 한번도 해본 적 없지? 한. 번. 도.. 확실히, 난 그렇게 해 본적이 없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형, 음악은.
마음속에 있는 거라구요.
말은 잘한다.
형은 웃고 있었다.
외롭지 않은 사람들이 외롭지 않은 순간에나 보여줄법한 그런 웃음을, 나는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이 지구상에는 화성인들이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지구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곳에-
어떻게 왔는지, 왜 왔는지,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내 조상의 이야기니까 단지 그러려니 할 뿐이다.
나도 화성인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꽤 많은 화성인이 지구의 공기 속에서
숨쉬며 자연스레 살아가고 있다.
나는 안다. 그들을 만나면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들은 지구의 무거운 중력에 힘겨워하고,
그 무게를 벗어나려고 힘써보지만 화성에서처럼
가벼워지기란 사실,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호흡하는 산소의
절반도 채 소모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무리 속에서
그들의 존재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외향적이거나, 내성적이거나의 차이에서 오는 존재감이 아닌,
한 생명체가 진동시키는 공기의 무게 -
그것은 그들을 언제나 외따로이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화성인이 아름답고 푸른 생명의 별-지구에서,
지구인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가령, 나는 어떤 여자를 '머쉬멜로우'한다.
이것은 화성인들의 말이지만, 지구에서 말하는
비슷한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굳이, 억지로 근접한 의미의 말로 바꾸어본다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머쉬멜로우'할 뿐이지,
결코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순간,
내 감정과 그 표현 사이의 아쉬움은 메울 수 없는
커다란 흔적이 되고,
그것은 상처로 남아 난 혼자 고통받고 괴로워한다.
왜냐면 난 그녀를 '머쉬멜로우'할 뿐이니까.
푸르른 지구가, 지구인들의 생명력을 그대로 닮고 있다면,
붉게 메마른 화성 역시 화성인들을 닮았다.
화성인들은 혼자다. 그건 우리들의 고향이 너무나 황폐해서
지하속에 혼자 살아남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어린시절,
어떤 화성인 할아버지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황폐하지 않은 이 지구상에서, 지구인들 사이에서,
화성인들은 여전히 고독하고 외롭고, 익숙하지 못하다.
모임에 익숙하지 않고, 웃고 떠드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표현하되 늘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것에 상처받는다.
화성에서는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물리적으로도 혼자였으니까.
그래서, 물리적으로 혼자가 아닌 이 지구 위에서도 늘 혼자이다.
지구인들은 '쟤들은 조금 이상한 애들이야'.
'외골수적이야'하고는 그냥 지나쳐버리고 만다.
그 덕분에 아직 화성의 비밀은 잘 지켜지고 있는 듯도 싶지만-
화성인들 중에는 잘 적응한 나머지,
지구인들과 구분이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여전히, 시간이 흘러도 적응하려 들지않는 화성인을
싫어하는 화성인들도 있다.
나는, 어떤 여자아이에게 구애한 적이 있다.
앞 뒤 구분 못할 정도로, 눈 앞이 멀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 같았고,
요동치던 그 감정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표현해보았지만 결국 그건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머쉬멜로우 하는 것과,
그녀가 받아들이는 사랑 사이에는 너무도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그때서야 깊이 깨달았던 것 같다.
화성인을 만나도, 화성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도,
어떤 상실감 같은 것을 채울수는 없다.
알고있다. 어린시절 같은 화성인을 만나면
나도 즐거워 질 수 있거나
혹은 내 마음속에 있는 어떤 공허함이나
그리움이 사라질 수 있을거라 믿었었지만
그건 사라질 수 없는, 고향을 떠나온 자들의
그리움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마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어쩐지 애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은
그 사람에게 있어 태고적부터 잃어버렸던
어떤 결여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과 비슷하다.
나는 하루키라는 화성인이 쓴 글을 좋아한다.
그 사람을 만난다 한들,
고향 사람을 만난다는 반가움이나
설렘 따위를 가질 수 있을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지 힘든 꿈 속을 헤메는 듯한 상실감을
공유할 수도 있구나,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구나,
이런 것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아 공감할 수 있구나 - 하는 아련한 희망같은것.
나는, 고향이 그리울 때면 데이빗 보위의
life on mars를 크게 틀어놓곤,
그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곤 한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당신은...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 고전주의자와 다원주의자가 있다.
고전주의자는 옳고 그름이 너무나도 분명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보는 관점이 '너무'강하다. 모든 고전주의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고전주의자는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 속에 타인을 구겨넣고, 자신의 잣대와 기준으로 타인을 심판하여, 그걸로 부족해 재단하려 드는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다수의 고전주의자' 되겠다. 현재의 시대에 맞게 바꾸어 말하면, '배치표적 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나는 미학전 다원주의자이다. 내가 다원주의자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편으론 나의 취향과 정서가 소위 말하는 절대 다수의 취향과 정서에 반하는 경우가 많아, 그로인해 시달릴만큼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생각의 자유- 간섭받지 않을 자유-고전주의자가 절대 권력을 가지는 것이 매우위험천만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멀지 않은 역사속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유태민 학살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그 자신의 기준을 권력을 이용해 타인에게까지 확산시키고, 그로인해 집단적 광기와도 같은 무서운 일들이 채 100년이 지나지 않은, 바로 20세기
에 저질러졌다. 고전주의자에게 있어 무서운 점은, 선과 악만이 존재하는 그만의 세계, 세상의 모든 것을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나누어 바라보고, 언제나 우열의 시각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
런 점에서, 언젠가 사람의 몇 퍼센트는 살 가치가 없다고 했던 자우림의 김윤아도 고전주의자이다.
지금은 어엿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있는 공병호씨도 고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겸손과 성실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잘난 척하고 오만한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런데, 난 그러헤 생각하지 않는다. 내 기준으로 볼 때, 나는 겸손보다는 '잘난 '이, 오만이 좋다.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호오에 불과한 사소한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 그렇기 때문에 굳이 타인에게까지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주장해서도 안되고, 그런데 고전주의자들은 한 개인의 호오에 불과한 이런 것들에 끊임없이 태클을 걸어온다. 왜 겸손이 옳은 가치인지 강조하고, 잘난 척과 오만이 왜 나쁜 것인지 힘주어 역설한다. 만약, 그들의 말대로 오만과 잘난 척이 나쁜 것이라면, 잡아가야 하는데 아무도 잡아가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생각해보건데, 마치 불의를 보면 견디지 못하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 같기도 하다.
또한 고전주의자들의 특징은 대중의 상식과 정서가 마치 절대적인 법인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의 상식과 정서도 미약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며, 그것이 그 사회
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할 자격조차 없는 것은 아니잖은가?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는 여자가 자위를 하면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수용됐다. 작금에 그것이 합리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다. 이처럼 대중의 상식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서늘한 느낌이 들곤 한다.
사실 고전주의자와의 그러한 논쟁은 굳이 말하자면 매우 불필요하다. 나는 나의 기준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우열의 시각 자체를 갖고있지 않기에- 애초에 우열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가하는 자와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나는, 다원주의자는 그저 이
러한 생각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것 뿐이다. 그러한 문제를 굳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끌고가서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 게다가 고전주의자들은 자신의 기
준이 옳거나, 혹은 그르거나와 같이 명백한 판가름이 나기 전엔 절대 물러서지 않기에,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무서워지고 꺼려지기까지 한다.
가령, 나는 귀여니의 소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역시 나의 호오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을 읽었고, 새로 나오는 작품도 읽어볼 계획이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 소설을 비판하려면
적어도 읽어보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귀여니의 소설을 욕할 수 있다. 얼마든지 마음에 안들어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귀여니를 욕하는 사람들이다. 그 소설을 좋아하는 욕
하는 고전주의자들이다.
그녀의 소설에는 기본권이 있다. 그걸 읽고 마음에 안들어서 무슨 욕을 하든간에 소설은 욕하는 사람들을 고소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에게는 기본권이 엄연히 존재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비보취급하고,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문화를 즐길 자유를 압박받고, 핍박받게 된다면, 그건 자유주의 사회가 아니다. 비록 나는 귀여니의 소설을 싫어하지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난 압박받는 쪽의 편을 들어 싸울 것이다. 그러한 일이 언제 내가 누리는 자유에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귀여니의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원주의자이고,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주위를 살펴보면 좋아하는 분야의 음악을 깊게 파고드는 매니아들이 있고, 좋아하는 가수에 심하게 열광하는 팬들이 있다. 여기서는 문희준을 예로 들겠다. 매니아들은 혹은 다른 대중들은 저게
음악이냐고 혹평을 내리고, 그들로부터 소위 빠순이라고 불리는 팬들은 귀도 없냐는 식으로 매니아들을 욕한다. 악순환이다.
악순환이 계속되어서는 곤란하다. 결국 자신의 호오에 인격을 투영시키게 되고, 그로 인해 결국은 인신공격으로 서로의 젊음을 소모하게 마련이라 더욱 그러하다. 엄밀히 말하면, 문희준의 음악을
욕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아까도 강조했지만 음악에는 기본권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에 자신의 인격을 과도하게 투영시킨 나머지 그로 인해 상처받고 타인을
공격하는 팬들이 더 문제다.
하지만 착각해서도 곤란하다. 매니아들이 열고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이 문희준의 음악보다 우월하다고 해서, 우월한- 음악에 이러한 기준을 적용시킨사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음악을 듣는 사
람이 우월한 것은 아니다. 아티스트의 실력이 우월하다고 해서 그것을 듣는 사람이 우월하다는 논리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과도한 인격투영의 결과라는 사
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더 덧붙인다면, 나는 팬 문화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사실 우리나라의 팬 문화에는 우리 고유의 것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고전
주의자들의 시각에서 그 문화가 좋은 것이든 혹은 저급한 것이든간에, (굳이 문화를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어야만 하는 시각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팬 문화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독창적이고, 우리들의 문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는 거다.
그에 반해, 매니아들의 문화는 전혀 독창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타국의 매니아 문화에 비해 독창적인 점이 뭐가 있나-오히려
따라가기에나 급급한 것으로 보여진다. 나는 동방신기의 음악을 싫어하고, 문희준의 음악을 증오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자유를 타인에 의해 간섭받고, 침해받는 순간이 오면 비록 난 그들이 좋아한느 음악을 싫어하지만, 그들의 편을 들어 함께 싸울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고전주의자가 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교육'되고 있다. 고전주의자만으로 세상이 가득차게 되면, 끔찍할꺼다. 불행히도, 내가 생각하는 우리 교육제도의 문제점은 역사 교육의 부재
도 아니고, 기초과학의 부재도 아니며, 모든 매체와 신문이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던 학력 저하현상도 아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육, 모든 것이 하나의 결과에 의해 우열로 나타나는 교육,
테카르트의 이원론이 무엇인지-스피노자의 일원론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지 않고 '데카르트는 이원론이야, 스피노자는 일원론이다'라고 가르치는 교육,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큰 기준이 우열임
을 무의식중에 심어버리는 교육이 아닐까. 주제는 다르지만 문득 '나쁜 교육'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사람은 소통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조금씩 상처받고, 조금씩 상처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존재감 그리고 타인의 존재감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그렇게 성장하고, 또 나아간다. 다양
한 시각과 기준이 공존하고 존중받는 세상은 참 재밋을거라고, 혼자 키득거리며 조금은 아련한 마음을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실신한 채로 비를 맞는 여자 같았다.
- p.147 '그리스인 조르바' 中에서
내가 어디 가서 끄트머리 수사법 하나에 걸고넘어가는 성격은 아니다. 그것은 본질-물론 내가 이 단어의 권위를 빌려 표현하고 싶은것은 '본질'이 아니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남들이 곧잘 신경쓰지 않는 전혀 뚱딴지같은 문장을 걸고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아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하필 이 문장을 인용하려 하진 않았을텐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연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다면, 심심하진 않겠구나.....
심심해! 심심해 미칠 지경. 이라고 하기엔 허나 지금의 심심함은 '젊고 건강해서, 그래서 가만 있질 못해서 심심하다'는 식으로 오히려 내게 유리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하여 그 바탕으로 동원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고요하고, 그윽하고, 이것이 냄새라면 절에서 나는 캐캐묵은 향내처럼 '별로 할말없는 냄새', 이것이 맛이라면 냉장고 밖에 내놓고선 깜빡 잊어버린 미지근한 맹물처럼 '별로 할말없는 맛', 뭐 그런 느낌이다. 밤 늦게 불꺼진 자취방으로 돌아와 마치 기대했다는 듯이, 당연하다는 듯이 파묻히는 그 '할말없는 암흑'. 그런 느낌이다.
이쯤되면 귀신이라도 나올 판이다. '관념'이라는 귀신이- 그 귀신에 홀린 사람들의 몰골은 익히 봐왔다. 귀신에 홀린 사람은 새벽녘에 싸이월드에다 '글'이라는 걸 토해내고는, 다음날 그걸 보고서 자신의 본모습이라 여긴다. 점차 그렇게 그는 귀신을 닮아가고, 마침내 귀신이 된다. 이것이 바로 관념이 우리에게 빙의되는 방법이다. (물론 나는 그들을 구제해줄 퇴마법을 알고 있다. 한게임 당구에 로그인하라! 얻을 것은 다마와 한게임 큐브요, 잃을 것은 머리에 씌인 귀신이다)
아무튼, 그것이 귀신일지언정, 그로 인해 우리가 심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지나친 심심함은 자신의 생명조차 의심케 하며, 나아가 죽음을 친숙케 한다. 심심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자살률이 높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는 사회과학도이다. 아무튼) 그렇다면, 귀신은 비록 폐인이 되게 할 지언정, 그나마 그 몰골을 하고서라도 우리의 생명을 유지케 하는 보루가 아닌가? 물론 그것은 아편으로 연명하는 불치병 환자 같은 삶이겠지만 말이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래! 아편이라도 좋다. 저 비오는 날의 뚱딴지같은 문장에 지금 나의 심심함을 덜어줄 실마리가 있다면,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다. 그러니 나도 해보자. 집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 짓을. 여자......라니, 말도 안된다. 여자는 무슨, 백번 양보해도 이미 성별이 희석된 시장통의 억센 아줌마 정도나 될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닝지 어른인지, 산은 그저 산이 아닌가? 그것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한다.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을 적에도 고작 동네 야산 주제에 별로 아름다워보이지 않았고, 가파른 것들이 집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그렇다고 딱히 위압감이 드는 것도 아니다. 산은, '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고도 꽃이 되지 못했다.
산과 나 사이에는 서로간에 주고받는 아무런 input이나 output이 없다. 바야흐로 '기관들 없는 신체'인 셈이다. 헌에 이 '기관들 없는 신체'라는 것은, 아무래도 철저한 유물론자들의 견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단지 그 표면에 생산이 코드화되어 나타날 뿐인데, 이는 실제로 기관들 없는 신체가 무언가를 생산해서가 아니라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라는 소리는, 얼핏 들으면 옳다쿠나 싶으면서도 짐짓 동의하고 싶지 않은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이는 곳 문근영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기 때문이다.
결국 들뢰즈는 문근영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문근영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열굴에 생산이 코드화되어 나타날 뿐인데, 이는 실제로 문근영이 무언가를 생산해서가 아니라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문근영의 그 세상의 온갖 소중한 것들을 간직한 듯한 얼굴은 삼라만상이 피어오르는 형이하학적 진원지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거짓-사실은 외부의 생산을 착취한 결과물로서-이라는 들뢰즈의 얘기는 뭐란 말인가? 이는 결국, 문근영의 얼굴을 보고서도 베이컨의 '정육점 그림'보듯이 적나라한 고깃덩어리를 연상하는 것만이 정당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여신을, 부정하겠다는 말인가? 발끈!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문근영의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문근영, '오빠들의 아편'-유물론자들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좋다, 그들의 말이 맞다. 문근영을 갈망하는 오빠들의 몸부림은 그들이 보기에 이 얼마나 맹목적인가. 기실 문근영은 아무것도 아닌데 세계가 덮어씌운 표면적인 이미지에 오빠들은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지금 이 세계에 대한 적절한 해석임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세계를 해석하는 일과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일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살아움직이는 것들은 기계 내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세계를 마치 하나의 그로테스크한 정육점 보듯 하는 그들의 세계관은 부처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세계의 표면에 절망을 새겨넣고 마침내 세계를 떠난 부처. 하지만 기실 서방정토란 세계 너머의 이방이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에 건설해야 할 무엇이 아닐까? 피안의 갈림길에서 관세음보살은 다시 뒤돌아섰다. 그 이유는, 바로 문근영 때문이다. 절망과 거짓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문근영은 있기에, 그녀를 구해야했기에. 관세음보살은 문근영을 택했다.
한동안 이 세계의 구성 원리를 한 편의 거대한 인질극이라 보았다. 그러한 틀 속에서 승리와 인간은 서로 배중률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는 듯도 하다. 관세음보살에게 문근영은 해탈의 포기가 아니라 서방정토 건설의 첫걸음이었다는 것을! 시지프스에게 주어진 형벌이 종국에는 시지프스의 승리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을 숙명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숙명이야말로 우리들 투쟁의 시작 지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심심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가 제시하는 욕망의 위계 질서로부터 이탈한 이들이 느끼는 고독이다. 그들은 왜 신선이 되는 대신 혁명의 길을 택하는가? 세계에 두고 온 문근영 때문이다. 그들은 부처가 아니다. 그들은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단지 세계가 제시하는 욕망의 카탈로그가 영 내키지 않아서 불만인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 속에서, 욕망 속에서 살고자 한다. 허나 그것은 분명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욕망일 것이다.
“현 정권을 씹어본다”
현 정권이 들어선지도 이제 4년째다. 대다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뽑힌 대통령님하의 사고방식은 예상대로 사람들의 생각과 매우 달랐다. 오늘은 그중에 하나. 그분이 가지신 평등과 분배에 대한 생각을 씹어볼까 한다.(편의상 그분으로 통일하겠음)
그분은 원래 어려운 여건에서 힘들게 올라오신 분 답게 매우 자립심이 강하시고 남의 눈치 따위 신경쓰지 않으신다. 그 결과 “지나면 역사가 알아줄 것”이라는 말 한마디로 “우매한 국민과 언론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정치를 구사하고 계신다..라는게 내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봤을 ‘실업급여’라는게 있다.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1년중에 6개월(181일인가 그런걸로 알고 있음) 이상 일한 사람은 어디서 일을 했건간에 나머지 6개월은 놀아도 일하던 6개월동안 취득하던 금액의 60~70%정도를 나라에서 주는 제도이다.
자, 그럼 이 돈이 어디서 올까? 대략적으로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계약직이나 정규 노동자의 경우는 소속 회사에서, 일용직 노동자 역시 그 사람이 일한 회사에서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의 이름으로 돈을 걷어가고 그 돈을 주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듯도 하다. 돈 많은 부르조아 기업가가 뼈빠지게 고생하는 피고용인들 보험료들 좀 내주면 어떠한가?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서 딴지를 걸려고 하는건가?
다들 얼마전까지 많이들 봤을꺼다. 지방자치단체 등의 정부기관에서 멀쩡해보이는 보도블럭 갈아엎고, 잘만 흘러가는 하천 막아서 갈아엎고 하는 것들..
다들 보면서 ‘저게 뭔 뻘짓+돈지랄이냐’했겠지만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15초만 생각해보면 초등학생이라도 그런 말 안할꺼라 믿는다.
그래도 편의상 적어보자면 각 지역에 속한 사람들은 그 지역 행정기관으로 세금을 낸다. 행정기관에서는 매우 중요한 기관의 운영과 그 지역의 편의보장 등에 필요한 돈을 쓴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디플레이션’이라는 골때리는 경우가 있다.
디플레이션이 뭔가 하면 쉽게 말해서 경기는 얼어붙는데 물가는 오르는 골때리는 경우다. 그래서 각 기관에서는 주민들에게 거둬들인 세금을 쓸때 ‘경기활성화’를 목적으로 하는 예산의 사용을 계획에 포함한다. 자, 그럼 이게 멀쩡한 길 갈아엎는거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조바심 내지 말고 읽어봐라. 주위에서 건축 ․ 토목 관련 산업을 보고 ‘기반산업’이라고 칭하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있을꺼라 믿는다. 말 그대로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산업.. 꼭 토목이나 건축이 아니라도 상․하수도나 전기 공사 등등 이런 것들을 칭하는 말인데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그 돈으로 낸 세금인데 엉뚱한데 쓸 수 없지 않나? 그런 소중한 주민의 혈세의 사용계획에 경기활성화를 목적으로 한 돈이 있다면 어디에 써야할까? 당연히 사회 기반산업이다.
보기에는 멀쩡해보이는 것들 갈아엎는걸로 보이겠지만 대부분이 수년~수십년 사용해서 조만간 수명을 다할테고, 그럼 어차피 해야되는거 돈 있는김에 하는거다. 물론 진짜 멀쩡한거 갈아엎는경우도 있다. 그건 X같은 환경단체 압박이나 민원, 아니면 그 현장 담당하는 기사가 멍청하거나..다양한 이유가 있을테니 그건 접어두고..
이런 기반산업에 돈 쓰는거랑 경기활성화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왜 없겠는가? 다리놓고 길 뚫는 걸로 인해 직접적으로 돈이 회사에 들어가면 각 기술자(속칭 노가다꾼, 인부)들, 그리고 공사에 필요한 장비 유지비(이게 또 장비 수리비, 소모품비, 기름값, 운전기사 월급 등등 다양하게 퍼진다), 그리고 자재값(각목이나 콘크리트 같은거.. 그거 역시 또 다른데로 퍼지겠지) 그리고 예상 못하겠지만 주변에 밥먹을 식당이라던가, 와서 괜히 시비걸어서 돈 뜯어가는 사이비 지방신문 기자들 떡값(ㅆㅂ) 등등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산다 이말이다.
위에 적은거에다가 더 추가할것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주제와 무관하니까 일단 넘어가자. 수긍을 하던 안하던, 2002년까지 그런식으로 경기활성화+분배가 이루어졌고 대략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현 정부의 분배정책 결과를 봤을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반산업 투자가 대량 감소하고 주민들의 혈세가 공무원연금, 국민연금 등을 매꾸고, 불법폭력 데모단체들한테 1,2억씩 아무렇지 않게 뜯기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거다.
이전 분배방식에도 분명 문제는 있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특성상 부익부 빈익빈을 해결하기 힘들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했음을 모두가 인정한지 20년 가량이 지났다. 그 승리의 근원은 부의 불균등을 인정하고 노력하면 남보다 앞서갈 수 있게 해주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의 정책은 무엇인가? 주변에 그런사람 있을까 모르겠는데 내 주변에는 1년에 3~4개월 일하고 3달 실업급여 받다고 다시 3~4개월 일하고 나머지는 실업급여 방고 하는 사람이 몇 있다. 그 사람들은 말한다. “일 뭐하러 그렇게 죽어라 해? 쉬엄쉬엄 즐기면서 해야지” 과연 이게 옳은 그림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남은 1년을 유지한다면 지금 정부는 나중에 “그럴때도 있었는데 지금 못할게 뭐냐”하고 생각할만한 최악의 정권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거같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사회는 과학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많은 전환을 맞게 되었다. 물론 21세기가 되었으니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손에 손잡고 한 순간에 바꾸어버린 것은 아니다. 변화는 연속적인것이니까 그 무렵부터 있었던 변화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뿐이다. 밀레니엄이라고 불렸던 <2000년>의 이듬해부터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서 내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으니까 개략적인 감상만을 적어보자면 세상은 확실히도 다이어트에 성공했단 거다. 어려모로 경량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많은 도구들의 경량화부터 시작해서, 비대했던 사회조직 역시 경량화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 때문인지 거리를 활보하는 수많은 처자들의 몸무게며 옷차림도 상당히 경량화 되었으며(이 경우에는 수많은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감상하는 측면에 서 있는 나로서는 순기능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덕택인지 사람들의 마음 또한 경량화되었다. 가벼움의 미학, 이라는 책을 한 권 써도 잘 팔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은 아쉽게도 그런 책이 나왔는지 안나왔는지는 내가 출판계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아서 현재상태로는 알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각설하고, 그 경량화 가운데 <쿨함>도 있었다고 확신한다. 이제껏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서양의식이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슬슬 제자리를 찾아 안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쿨하다는 표현이 안착하기 쉬웠던 환경은 사회가 경량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가 일단 가벼워졌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던 방식이 예전의 <인맥 혹은 준비된 자리>에서 <우연한 만남>으로 일부 전이된 탓도 있을거라고 본다.
대중매체는 쇼 프르그램을 방송하며, 그 중에도 짝짓기 프로그램을 양산하기 시작한다.예전의 가족단위적 쇼를 벗어나 초점을 <가족 전체>가 아닌 <젊은 남성과 여성>으로 좁혀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들은 시류에 맞아 떨어진 탓인지 상당한 성공을 보였으며, 결국 현재까지도 공중파의 주요 방송시간대를 점하고 있다. 고민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일단 마음에 드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고, 너무도 쉽게 그 손을 잡고, 저 좋은 사람(인듯한)이 보이면 망설임 없이 손을 놓고, 빼앗긴 사람도 그다지 아쉬운 기색 없이 웃고 만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쿨함의 표본이다. 쿨함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정과 시간 등에 가려진 이면을 아주 쉽게 내버린다. 사랑의 본질이 쌍방의 감정적이며 이성적인 타협점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쪼록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그 충실한 쿨함의 표본을 자습서 삼아 쿨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 모든 사람들이 유행을 따르기 위해서 쿨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쌍방의 관계에서 남녀상열지사든 혹은 다른 관계이든 간에 쿨한 쪽과 쿨하지 않은 쪽이 있다고 생각하면 결국 비참해지는 쪽은 쿨하지 못한 쪽이기 때문이다. 쿨함은 그런 면에서 대범이나 점잖은 척과 맥이 통하기도 한다.
“우리 그냥 이쯤에서 헤어져”
“난 널 놓을 수 없어!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왜 이래, 귀찮게, 서로 쿨해지자고. 이래봤자 너만 힘들어”
혹은
“이젠 학점에 대해서도 좀 쿨해질 필요성을 느껴”
“잘났어, 정말,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학점이 전부는 아니고, 그만큼 다른데서 잠수 따면 되지 뭐,
그까짓 학점이야”
이상의 대화들이 쿨함의 전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쿨한 쪽과 않은 쪽이 대화를 하다보면 쿨하지 않은 쪽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찌질이’가 된 기분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만이 속 좁고 못나 보이기 마련. 그래서 간간이 찾아오는 그런 경험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쿨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그것은 신종 페스트와 같이 순식간에 퍼져나가, 어느새 지금은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아 버리게 된 것이다. 어느 안방 드라마 오프닝 송에 나와도 의아스럽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또, 사람과 사람이 만나던 방식 중에 의외성에 기반한 것이 많아졌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일회성 만남에 익숙해졌으며, 그런 만남을 주선할 수 있는 장소도 예전에 비해서 많아졌다. 일단 일회성 만남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 마음에 드는 누구에라도 접근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그 사람이 만일 화를 불같이 내고 가버린다면 어깨를 가변게 한 번 으쓱해주는 것도 쿨한 사람의 센스다). 또 예전의 나이트클럽과는 다르게 클럽 등의 놀이문화가 폭 넓게 대중에게 어필했던 것은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좁은 공간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부딪힘은 필연적으로 만남을 유발하게 되고,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어울림 이후에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쉽다. 왜냐하면 그때는 서로가 평상심을 잃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쿨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대사회는 가볍고 쉽다. 충분히 쿨할만큼 쿨해졌다고 생각한다. 만남도, 사랑도, 섹스도, 이별조차 쉽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별이 쿨해야 한다는 것은 구차하게 서로 눈물 쏟으며 질질 끌지 않는 것, 깔끔하고 뒤끝없는 완벽한 감정정리를 통해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 위에서도 다른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가짐이라고. 이들 후 마주친, 서로 다른 커플 - 나와 전 애인 - 의 어색할 법한 상황에서도 안녕, 하고 싱긋 웃으며 손 흔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마다 나는 매번 가슴팍을 세게 한 번 차인 기분을 버릴 수 없다. 그럴거면 연애를 하는 목적,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사람을 만나는 목적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쿨함들은 내게 있어서는 도무지 감정의 질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질식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두렵기 때문이다. 애써 강한 척 하는게 무너져내린다면 더는 잡을 곳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적당히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적당히 만나고 사랑도 적당히 한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이미 이별의 대사가 마음속에 준비되어 있다. 이별을 전제하고 고려해둔 사랑이다. 쿨하기 위해서는 예비동작이 있어야 한다. 헤어져도 깔끔할만큼, 상처받지 않을 만큼 적당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아야 한다.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겁기 위해서> 만나는 시간이고, 굳이 힘들게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바보가 된다. 이 사회에 끓어 넘치는 멜로영화들은 모두 멸종된 공룡들에 대한 추모 내지는 그리움과 같은 맥락인가? 몇 백만이 넘게 봤다고 하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친구 같은데 나왔던 인물들은 과연 몇 퍼센트나 쿨했던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서는 찬양하면서 아직도 쿨하기에만 여념이 없으니 참 답답할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