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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07 심심함에 대한 분석

심심함에 대한 분석

Posted 2008/04/07 13:35 by arc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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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슬픔으로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 같았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실신한 채로 비를 맞는 여자 같았다.


 - p.147 '그리스인 조르바' 中에서


내가 어디 가서 끄트머리 수사법 하나에 걸고넘어가는 성격은 아니다. 그것은 본질-물론 내가 이 단어의 권위를 빌려 표현하고 싶은것은 '본질'이 아니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남들이 곧잘 신경쓰지 않는 전혀 뚱딴지같은 문장을 걸고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아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하필 이 문장을 인용하려 하진 않았을텐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연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다면, 심심하진 않겠구나.....


심심해! 심심해 미칠 지경. 이라고 하기엔 허나 지금의 심심함은 '젊고 건강해서, 그래서 가만 있질 못해서 심심하다'는 식으로 오히려 내게 유리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하여 그 바탕으로 동원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고요하고, 그윽하고, 이것이 냄새라면 절에서 나는 캐캐묵은 향내처럼 '별로 할말없는 냄새', 이것이 맛이라면 냉장고 밖에 내놓고선 깜빡 잊어버린 미지근한 맹물처럼 '별로 할말없는 맛', 뭐 그런 느낌이다. 밤 늦게 불꺼진 자취방으로 돌아와 마치 기대했다는 듯이, 당연하다는 듯이 파묻히는 그 '할말없는 암흑'. 그런 느낌이다.


이쯤되면 귀신이라도 나올 판이다. '관념'이라는 귀신이- 그 귀신에 홀린 사람들의 몰골은 익히 봐왔다. 귀신에 홀린 사람은 새벽녘에 싸이월드에다 '글'이라는 걸 토해내고는, 다음날 그걸 보고서 자신의 본모습이라 여긴다. 점차 그렇게 그는 귀신을 닮아가고, 마침내 귀신이 된다. 이것이 바로 관념이 우리에게 빙의되는 방법이다. (물론 나는 그들을 구제해줄 퇴마법을 알고 있다. 한게임 당구에 로그인하라! 얻을 것은 다마와 한게임 큐브요, 잃을 것은 머리에 씌인 귀신이다)


아무튼, 그것이 귀신일지언정, 그로 인해 우리가 심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지나친 심심함은 자신의 생명조차 의심케 하며, 나아가 죽음을 친숙케 한다. 심심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자살률이 높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는 사회과학도이다. 아무튼) 그렇다면, 귀신은 비록 폐인이 되게 할 지언정, 그나마 그 몰골을 하고서라도 우리의 생명을 유지케 하는 보루가 아닌가? 물론 그것은 아편으로 연명하는 불치병 환자 같은 삶이겠지만 말이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래! 아편이라도 좋다. 저 비오는 날의 뚱딴지같은 문장에 지금 나의 심심함을 덜어줄 실마리가 있다면,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다. 그러니 나도 해보자. 집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 짓을.  여자......라니, 말도 안된다. 여자는 무슨, 백번 양보해도 이미 성별이 희석된 시장통의 억센 아줌마 정도나 될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닝지 어른인지, 산은 그저 산이 아닌가? 그것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한다.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을 적에도 고작 동네 야산 주제에 별로 아름다워보이지 않았고, 가파른 것들이 집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그렇다고 딱히 위압감이 드는 것도 아니다. 산은, '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고도 꽃이 되지 못했다.


산과 나 사이에는 서로간에 주고받는 아무런 input이나 output이 없다. 바야흐로 '기관들 없는 신체'인 셈이다. 헌에 이 '기관들 없는 신체'라는 것은, 아무래도 철저한 유물론자들의 견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단지 그 표면에 생산이 코드화되어 나타날 뿐인데, 이는 실제로 기관들 없는 신체가 무언가를 생산해서가 아니라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라는 소리는, 얼핏 들으면 옳다쿠나 싶으면서도 짐짓 동의하고 싶지 않은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이는 곳 문근영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기 때문이다.



결국 들뢰즈는 문근영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문근영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열굴에 생산이 코드화되어 나타날 뿐인데, 이는 실제로 문근영이 무언가를 생산해서가 아니라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문근영의 그 세상의 온갖 소중한 것들을 간직한 듯한 얼굴은 삼라만상이 피어오르는 형이하학적 진원지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거짓-사실은 외부의 생산을 착취한 결과물로서-이라는 들뢰즈의 얘기는 뭐란 말인가? 이는 결국, 문근영의 얼굴을 보고서도 베이컨의 '정육점 그림'보듯이 적나라한 고깃덩어리를 연상하는 것만이 정당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여신을, 부정하겠다는 말인가? 발끈!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문근영의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문근영, '오빠들의 아편'-유물론자들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좋다, 그들의 말이 맞다. 문근영을 갈망하는 오빠들의 몸부림은 그들이 보기에 이 얼마나 맹목적인가. 기실 문근영은 아무것도 아닌데 세계가 덮어씌운 표면적인 이미지에 오빠들은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지금 이 세계에 대한 적절한 해석임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세계를 해석하는 일과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일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살아움직이는 것들은 기계 내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세계를 마치 하나의 그로테스크한 정육점 보듯 하는 그들의 세계관은 부처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세계의 표면에 절망을 새겨넣고 마침내 세계를 떠난 부처. 하지만 기실 서방정토란 세계 너머의 이방이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에 건설해야 할 무엇이 아닐까? 피안의 갈림길에서 관세음보살은 다시 뒤돌아섰다. 그 이유는, 바로 문근영 때문이다. 절망과 거짓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문근영은 있기에, 그녀를 구해야했기에. 관세음보살은 문근영을 택했다.


한동안 이 세계의 구성 원리를 한 편의 거대한 인질극이라 보았다. 그러한 틀 속에서 승리와 인간은 서로 배중률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는 듯도 하다. 관세음보살에게 문근영은 해탈의 포기가 아니라 서방정토 건설의 첫걸음이었다는 것을! 시지프스에게 주어진 형벌이 종국에는 시지프스의 승리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을 숙명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숙명이야말로 우리들 투쟁의 시작 지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심심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가 제시하는 욕망의 위계 질서로부터 이탈한 이들이 느끼는 고독이다. 그들은 왜 신선이 되는 대신 혁명의 길을 택하는가? 세계에 두고 온 문근영 때문이다. 그들은 부처가 아니다. 그들은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단지 세계가 제시하는 욕망의 카탈로그가 영 내키지 않아서 불만인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 속에서, 욕망 속에서 살고자 한다. 허나 그것은 분명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욕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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